김현석 감독이 2017년 9월 21일 선보인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단순한 웃음을 주는 코미디처럼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뭉클한 감정과 깊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도깨비 할매'로 불리며 매일같이 구청에 민원을 넣는 노인과 원칙주의자 공무원이 만나 티격태격하는 과정을 그리는 듯하지만, 이야기는 점차 위안부 피해자라는 상처와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확장된다. 이 영화는 유쾌함과 뭉클함 사이를 오가며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모두 이끌어낸다.
가볍게 시작해 깊이 있게 나아간 이야기
영화의 도입부는 익숙한 코미디적 설정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매일같이 구청을 찾아다니며 무려 8천 건이 넘는 민원을 제기하는 '옥분'(나문희)은 지역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도깨비 할매’로 통하며, 사람들이 기피할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여기에 갓 부임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등장하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민재는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는 인물로, 민원 폭격에 시달리며 옥분과 충돌을 빚는다. 옥분은 어느 날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처음엔 엉뚱하고 귀찮은 요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민재가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옥분은 물러서지 않고, 끝내 민재를 자신의 영어 선생으로 만든다. 학원에서 쫓겨나고, 개인 과외도 힘든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민재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영어 수업은 마치 도토리 키 재기처럼 시작된다. 민재는 하루 만에 어려운 단어 20개를 외워 80점을 넘기라는 시험을 제안하며 시험 삼아 옥분의 열의를 시험한다. 아깝게 실패한 옥분은 포기하지 않는다. 뒤늦게 정답 하나를 더 떠올리지만 민재는 원칙을 이유로 수업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후 민재의 동생 ‘영재’가 옥분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그들을 잇는 연결 고리가 생긴다. 이 작은 사건이 옥분과 민재의 관계를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민재는 결국 옥분에게 주 3회 영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두 사람의 독특한 수업이 시작된다. 시장 상인들의 간섭, 민원인들의 소란, 공무원 조직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언뜻 보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는 이 과정이 관객에게 따뜻한 울림을 준다.
숨겨진 아픔과 ‘영어’라는 통로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옥분’이라는 인물의 진짜 이야기가 드러난다. 그녀가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말,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위안부 피해자로서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친구 정심(손숙) 역시 같은 아픔을 겪은 인물로, 해외에서 증언 활동을 이어가다 통역사의 왜곡된 번역으로 무력감을 겪고 끝내 치매로 병원에 입원한 상황이다. 정심의 뒤를 이어 자신이 직접 영어로 말하고자 하는 옥분의 결심은 단순한 민원인 노인의 엉뚱한 행동으로 치부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절실한 것이다. 옥분이 치매에 걸린 친구를 대신해 말하겠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깊은 우정과 죄책감, 그리고 책임감이 얽혀 있다. 영화는 이러한 사연을 아주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언어의 장벽으로 세상에 닿지 못하는 현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나는 영어를 잘해서 말하고 싶다”는 옥분의 절절한 바람은 단순한 언어 학습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진실을 세상에 남기려는 의지 그 자체였다. 민재는 결국 옥분이 미국에 있는 동생과 통화를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동생은 이미 과거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연락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또 다른 상처로 다가오지만, 옥분은 이내 방향을 바꾼다. 동생과의 화해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진실을 전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임을 깨닫는다. 정심이 병원에서 보게 된 영상 속에서 옥분이 영어로 진실을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녀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오래도록 남아 있으며, 잊히지 않고 되살아나는가를 보여준다. 단지 과거의 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될 피해자의 고통을 담담하지만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이 장면은 영화의 정점을 이룬다.
작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기보다 일상적이고 따뜻한 이야기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옥분이라는 캐릭터는 피해자이기 이전에,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집요함은 결국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하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녀를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민재 역시 그 진심을 깨달으며 스스로의 신념과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민재의 변화 또한 세심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원칙을 중시하며 매뉴얼에만 의존하던 공무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옥분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공공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체득해 나간다. 그가 옥분을 도우면서 승진하고,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전형적인 성장 서사의 변주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영화는 옥분의 서사와 민재의 성장 서사를 병행하면서 한 사람의 용기가 다른 사람의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아이 캔 스피크》는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웃음을 주지만 그 안에서 곱씹을만한 메시지를 남기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고통받은 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지적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단지 피해의 진실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사람들의 사명 또한 되새기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러한 메시지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나문희는 도깨비 할매의 억척스러운 면모와 가슴 깊은 상처를 모두 표현해 내며, 왜 이 영화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지를 증명한다. 이제훈 역시 무미건조한 공무원에서 진심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냈다. 둘의 케미는 예상외로 깊고, 따뜻하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어로 말하고 싶다”는 한 문장이 이토록 깊은 감정과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조용한 외침처럼 다가온다.